“시간이 멈춘 것 같죠?” 서울 을지로 ‘을지다방’에선 주인 박옥분씨가 끓여주는 얼큰한 라면이나 달달한 쌍화차를 맛볼 수 있다. 사진=강재훈 프리랜서 기자


카페에선 무관심이 미덕이다. 누가 말을 걸어오면 당황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구수한 보리차부터 주며 살갑게 맞는 찻집도 있단다. 바로 다방. 평생 카페만 가본 기자에겐 생경한 풍경이다. 시린 겨울이 오기 전, 몸과 마음에 온기를 채우고자 서울 중구 을지로 일대의 다방으로 떠났다.
“어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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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향한 곳은 을지로 노가리골목 건너편, 41년째 운영 중인 ‘을지다방’이다. 문을 열자 밝은 목소리가 먼저 마중 나온다. 카운터에 있던 주인 박옥분씨(68)가 “어디서 왔냐”며 “찬찬히 둘러보고 마음 가는 자리에 앉으면 된다”고 환히 웃는다. 가게엔 딱딱한 의자 대신 오렌지빛 소파가 가득하다. 좌판과 야마토릴게임 등받이는 보기만 해도 포근하고 높이가 낮아 발이 바닥에 편히 닿는다. 테이블마다 설탕 병이 놓인 점도 독특하다. 박씨는 “시간이 멈춘 것 같죠?”라며 “모두 저와 함께 나이 먹은 보물들”이라고 했다. 이제는 구하기도 힘들단다.
벽엔 브라운관 텔레비전, 큰 글자 달력, 알록달록한 메뉴판이 붙어 있다. 그런데 그 사이로 아이돌 가수인 방탄 릴게임갓 소년단(BTS) 사진이 보인다. 방탄소년단이 박씨의 마음까지 흔들었나 의아하던 차에 박씨가 “아, 여기서 촬영도 많이 했다”며 귀띔한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레트로(retro·복고)’ 열풍이 불면서 다방이 이색 공간으로 떠오른 것이다. 요즘은 학생이나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 명소가 됐다. 박씨는 “버텨온 보람이 있다”며 “한창땐 직원 9명을 두고 일 릴게임5만 하다가 자판기 커피가 나온 뒤론 부업까지 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라면 하나요.”
다방을 찾은 50대 손님이 메뉴판에 없는 식사를 주문한다. 박씨는 당황한 기색 없이 물을 올린다. 보글보글 끓는 라면에 달걀을 탁 깨서 풀고, 갓 지은 밥과 직접 담근 김치 모바일바다이야기 도 곁들인다. 가격은 4000원. 박씨는 “근방에서 일하는 손님을 위해 오전 11시까지만 파는 메뉴”라며 “아직도 테이블이 가득 찰 정도로 잘 팔린다”고 힘차게 말했다. 이처럼 다방엔 숨겨진 메뉴를 찾는 재미도 있다. 오랜 세월 장사하면서 쌓아온 정의 흔적일 터다.



“차 한잔해야지. 우린 쌍화차가 제일 잘나가요.”
박씨가 따뜻한 물에 반쯤 담긴 찻잔을 꺼낸다. 차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그만의 노하우다. 펄펄 끓는 쌍화차를 붓고 노른자를 살포시 띄운다. 보름달같이 예쁘긴 한데 어떻게 먹을지 난감하다. 박씨는 “티스푼으로 노른자를 차 속에 여러번 담갔다가 빼야 한다”며 “겉이 살짝 익어야 맛도 좋고 한입에 넣기도 제격이다”라고 미소지었다. 먼저 노른자만 쏙 떠서 맛보자 고소한 향이 입안에서 톡 터진다. 그다음 잣·대추가 가득한 음료를 후후 불며 들이켠다. 각성 효과를 위해 찾던 카페와 달리 다방에선 몸이 사르르 녹는다.



1971년 을지로에 문을 연 ‘원커피숍’. 주인 박정연씨가 건네는 요구르트가 별미다. 정겨운 분위기를 찾아온 손님도 다양하다.








오후엔 도보로 3분 정도 떨어진 ‘원커피숍’으로 향한다. 1971년부터 을지로를 지켜온 터줏대감이다. 미지의 세계로 이어질 듯한 지하 계단을 내려가자 삼삼오오 모인 어르신들이 보인다. 주인 박정연씨(66)가 “오는 길이 춥진 않았냐”며 반갑게 눈을 맞춘다. 주문도 받기 전 그가 건넨 작은 요구르트 한병. 살굿빛 달큼함에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른다. 소파에 몸을 기댄 두 친구 조성일씨(65)·이성재씨(65)도 자연스레 옛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조씨는 “이젠 나이 든 손님이 많지만 대학시절엔 다방이 만남의 장소로 통했다”며 “그때가 그리워 찾곤 한다”고 미소지었다. 이씨도 “가끔 귤 같은 제철과일을 그냥 줄 때도 있는데 참 정겹지 않냐”고 덧붙였다.



“뭐가 필요해요? 말만 해요.”
카운터 주변에 학생들이 서성이자 박씨가 먼저 다가간다. 최지율양(17)·유지나양(17)이 “메뉴판이 어디 있어요?”라고 합창한다. 박씨는 “내가 바로 걸어다니는 메뉴판”이라며 “커피·차 다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두 학생은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으며 커피와 매실차를 주문한다. 기계로 추출한 에스프레소 대신 커피·프리마·설탕을 황금비율로 탄 ‘다방 커피’를 맛본다. 최양은 “수능이라 학교가 쉬는 김에 와봤다”며 “의자도 편하고 포근한 분위기가 할머니집 같다”고 했다. 금세 적응한 두 학생은 다방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든다. 분주하게 일하다가도 박씨는 문 앞까지 나와 손님을 배웅한다.
“또 오세요! 추우니 감기도 조심하고.”
카페의 미덕이 지겨워질 땐 다방에 가는 변덕을 부려보는 건 어떨까. 색다른 음료를 맛보고 따뜻한 환대도 맞으면 다가올 겨울이 두렵지 않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