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리 은행나무의 가을을 그린 작품. 남해의봄날 제공


1300여년 수령의 웅장한 거목에 반해매일 나가서 그리면서 세계관 변해생명력 넘치는 작품과 깊은 사유, 책으로
2019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누군가 에스엔에스(SNS)에 올린 나무 한 그루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침, 집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나무였다. 당장 차를 몰아 찾아간 원주의 반계리 은행나무. 수령 1318년의 웅장한 거목이었다. 나무를 보는 순간 강력한 인력을 느꼈다. “지난 30년간 그려온 나무 그림들의 결정체를 보 바다이야기온라인 는 듯했지요. 나무의 형태와 크기, 살아낸 기간, 생명력 넘치는 모습 등 ‘나무’ 하면 떠오르는 모든 걸 갖추고 있었어요. 1년 정도 이 나무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바로 다음 날부터 드로잉 도구를 챙겨 나무 앞에 자리를 잡았다. 폭우나 폭설이 쏟아지는 날을 제외하곤 매일 아침 7시부터 낮 2시까지 오롯이 한 대상만 바라보며 그렸다.
바다이야기릴게임 1년 정도 지나고 나무의 사계를 담은 1000호 대작 4점을 비롯해 유화 40여점, 드로잉 70여점으로 대형 전시를 열었다. 전시가 끝난 뒤 나무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갔다. 뜻밖에도 나무는 또 완전히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웠다. “너무 당혹스러웠어요. ‘내가 도대체 1년간 뭘 본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결심했어요. 시간을 정하지 말고, 손오공릴게임예시 나무가 그만 오라고 할 때까지 그려보자고.”
그렇게 6년째 반계리 은행나무를 그리고 있는 최선길 화가가 ‘어느 날, 한 나무를 만났다’를 펴냈다. 출판사 남해의봄날이 선보이는 ‘화가의 책’ 시리즈로 출간된 이 책은 그의 40년 예술 세계를 아우르는 기록이다. 책에는 빛과 바람까지 담아낸 작품들과 장인의 묵직한 사유가 담겨 있다. 책은 예 체리마스터모바일 술적이면서 종교적이고 또 철학적이면서 구도적이다. 한 대상을 5년 넘게 그리고 또 그리는 과정은 수행과 같아서 수백만, 수천만번의 붓질은 결국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서울 선정릉 인근 아트큐브투알투 갤러리에서 그의 전시 ‘천년의 노래: 가을의 서사’를 다음달 17일까지 바다이야기예시야마토게임 관람할 수 있다. 본인 제공


30년 이상 한국의 산과 나무, 자연을 그려온 그였지만, 이렇게 한 대상만 들여다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저는 60년 좀 넘게 살았는데 이 나무는 1300여년을 살았잖아요. 마치 나무가 ‘나도 이렇게 살았는데 너도 한번 잘 견뎌봐’라고 위로를 주는 거 같았어요. 6년을 보면 지겨울 법도 한데, 갈 때마다 새로운 모습과 함께 위로를 주니까 떠날 수가 없네요.”
특히 이 작업은 그를 ‘보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로 이동시켰다. “화가는 보는 것에 익숙해지고 보는 훈련이 잘돼야 한다는 게 제 지론이었어요. 면밀히 봐야 하고 남들이 안 보는 걸 봐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1년을 그리고 나서도 이 나무를 처음 보는 거 같다고 했잖아요. 그건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보이지 않았던 모습들이 보이는 거예요. ‘본다’라는 것과 ‘보인다’라는 것이 너무나 다르다는 걸 알게 됐죠. 보려는 마음을 비워야 보이더라고요. ‘보인다’는 건 존재의 현현을 경험하는 순간이고, 신이 내린 은총의 영역입니다. 지금은 사생을 나가도 학습된 안목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는 그 자체가 보이기를 기다리죠. 그렇게 세계관이 크게 바뀌었어요.”



어느 날, 한 나무를 만났다 글·그림 최선길, 남해의봄날, 2만5000원


요즘 대부분의 화가가 사진을 기반으로 그림 작업을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에 나가 직접 그리는 사생을 고집한다. “그림은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해서 완성될 때까지 시간이 축적되는 작업입니다. 현장에 나가 대상을 바라보면, 그 현장도 살아 움직여요. 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가고, 바람도 불었다가 사라지고, 빛도 밝았다가 어두워지고 계속 변합니다. 그걸 고스란히 화폭에 담아야 살아 있는 그림이고 진실한 그림이라고 봐요.”
원래는 여름 나무의 짙은 생명감을 좋아했던 그는, 은행나무를 그리며 겨울나무를 좋아하게 됐다. “여름에 잎사귀가 무성하고 짙게 물든 게 좋았는데요. 겨울이 되면 잎사귀로 감추고 있던 나무의 실체가 다 드러나잖아요. 혹독한 계절에 오히려 옷을 벗는 존재라니, 그 모습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지금은 겨울의 나무를 참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전국 미술대회를 휩쓴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미술 선생님의 방을 가득 채운 유화에 압도돼 화가의 꿈을 품게 됐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뒤 서울예고와 이화여대 등에서 강의를 하며 작업을 병행하다 10년 전부터 원주에 터를 잡고 전업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은행나무와의 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회가 된다면 가로 10미터 세로 5미터 정도의 대작을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가로 1.2m 세로 1미터 캔버스를 40개 이상을 이어 붙어야 한다. 각기 다른 시간대에 그려진 40여개의 그림을 한데 모으면 어떤 세계가 나타날지 기대된다.
한편, 서울 선정릉 인근 아트큐브투알투 갤러리에서 12월17일까지 그의 전시 ‘천년의 노래: 가을의 서사’가 이어진다. 그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 반계리 은행나무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